김정혜 장학금 이야기

누군가의 간절한 등록금이 되어준 이름

4월 2일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접견실에서 김정혜 동창(의학·70졸)의 기금 전달식이 열렸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의 김정혜 동문(19기)은 졸업과 함께 미국 이민을 선택하여 마취과 전문의로 활동하였으며, 타국에서도 이화의대 후배들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뜻을 담아 2010년에는 ‘백분의일의나눔 장학금’ 기부에 참여하였고, 2022년에는 ‘김정혜 장학금’을 신설하였으며 2024년 의과대학 대학원생 장학금 등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 누적 36만 4000달러(한화 약 5억 3000만원)를 기부하였다. 학생 기자단 취재진은 김정혜 선배님의 나눔과 봉사 정신을 본받고자 직접 만나뵙고, 인터뷰를 나누었다.

Q 어떤 계기로 의과대학 졸업 후 미국 이민을 떠나셨나요?

A 저는 64년에 입학하여 70년도에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졸업했어요. 당시에는 한국 대학병원에 수련 자리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련을 고려한 많은 의과대학 학생들이 미국행을 선택하였지요. 미국에서 한국 의사에 대한 대우도 좋았고, 외국인 의사에 대한 문호가 막 개방되었던 시기라서 큰 제약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제 졸업생 중 3/5는 졸업과 동시에 저와 마찬가지로 미국 이민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Q 해외 의사로서 어떤 커리어를 밟으셨는지, 미국 의사로서의 삶과 이민 생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A 당시 미국 인턴십은 '로케이션 시스템'이어서 제가 원하는 병원이 아니라 배정된 병원으로 가야 했습니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영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언어적인 약점을 몸으로 메우려 노력했어요. 특히 마취과는 당직이 많은 과인데, 수술 시간이 길다 보니 중간에 의료진들이 쉴 수 있도록 수술실을 대신 지키는 역할도 했고, 수술 전 차트 작성과 약 오더도 모두 제가 맡았어요. 하루에 수술이 30~35건 정도 있었는데, 그에 앞서 입원한 환자들을 사전 체크하는 일도 당직마다 제가 도맡았죠. 일을 마치면 밤 12시쯤 되었고, 그 후엔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병원 숙소에서 대기하며 응급 콜을 받거나 응급 수술 스텝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하루가 끝나면 다리가 부어 있을 정도로 힘들었고, 쉽게 잠에 들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내고 인턴이 끝나고 나면, 원하는 병원에 직접 지원할 수 있게 돼요. 저는 약 100군데 정도 병원에 지원했고, 그중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서 연락을 받게 되었죠. 제가 마취과를 선택한 이유는 가정을 꾸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취과는 비교적 근무 시간이 명확하고, 워라밸을 기대할 수 있는 과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힘들었지만,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걸 다 해냈을까’ 싶지만, 결국 해냈고, 정말 힘든 상황이 와도 닥치면 다 하게 되더라고요. 처음엔 ‘영어를 못해서 돌아가게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언어 문제로 귀국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언어는 시간이 해결해줍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Q 후배들에게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전달하고 계신 것을 보면 모교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데요, 의과대학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A 사실 제가 최근에야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정신적으로도 조금 더 성숙해지면서 옛날 생각이 나서 시작한 일이에요. 제가 특별히 착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웃음) 물론 쉽지는 않지만, 결국 사람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의대 시절에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공무원이셨는데, 당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와 맞물리면서 상황이 좀 어려워졌죠. 당시 아버지 친구분이 제 등록금을 대신 내주신 적도 있었고,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닌 기억도 있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성적이 3.2 이상이어야 해서 늘 열심히 공부했고, 장학금을 받을 때면 스스로도 자신감이 생기고 부모님께도 조금은 효도한 것 같아 보람을 느꼈어요. 의대를 졸업하고 나서 보니, 제 주변 사람들 누구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각자 자기 길을 잘 걸어가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정말 어떻게든 졸업만 할 수 있다면, 누구나 사회에 나가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난 때문에 졸업을 못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후배들을 돕기 시작했어요.

Q 모교에 대한 애정이 많아 보이시는데 의과대학 다니실 때 뜻 깊었던 경험이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A 저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공부가 너무 힘들어서, 잠을 참기 위해 잠 안 오는 약까지 먹고 공부를 했는데, 그 약을 먹으면 입맛이 없어져요. 그래서 3~4일 동안 거의 밥을 못 먹고 공부를 하다 보니 위가 상해서 결국 위내염까지 걸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동네 아이들 과외를 병행했어요. 몸은 아픈데 과외하고 공부까지 하려니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학교를 몇 번 결석하기도 했죠. 그래도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주변의 따뜻한 도움 덕분이었어요. 지금은 뉴욕에서 같이 의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그 당시 수업 노트를 자주 빌려주곤 했습니다. 그 덕분에 수업을 못 나간 날에도 큰 어려움 없이 따라갈 수 있었죠. 지금도 그 친구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Q 선배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점은, 선배님께서는 나누시는 정신이 몸에 배어 계신 것 같습니다.

A 아마 어머니에게 배운 것 같아요. 예전엔 다들 가난했잖아요. 저희 집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어머니는 노상에서 물건 파는 분들이 집에 들르시면 꼭 찬밥이라도 먹여서 보내셨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고 자랐죠. 지금은 제 자신에게 무언가를 쓰는 게 오히려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고 싶은 건 다 젊을 때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차라리 그 돈을 남에게 쓰면, 그건 누군가의 인생에 진짜 도움이 되는 값진 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저는 굉장히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에요. 남에게 자랑하거나 나서는 성격은 아니에요. 그런데도 제 이름을 걸고 장학금을 만들게 된 건, 누군가 이런 걸 보고 ‘아, 이런 사람도 있네.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어요. 제 동기들에게도 이런 얘기 한 적 없고, 가능하면 익명으로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저처럼 소심한 사람도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누군가 따라 해보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고 용기를 냈습니다.

Q 졸업 후에도 장학금 기부를 비롯하여 꾸준히 이화 의대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요, 그 사이에 이화는 물론 대한민국이 많이 바뀌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여성 의사들이 곳곳에서 활약을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또, 후배들한테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A 요즘 여성 의사들이 정말 많아졌잖아요. 저는 여성들이 참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특히 멀티태스킹 능력은 남성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여자의사들이 앞으로도 더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고, 또 그런 흐름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여성들에게도 능력의 한계가 오는 시점이 올 수 있다는 것이에요. 결혼, 출산, 육아 같은 삶의 여러 국면들이 자연스레 따라오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젊고, 자기 역량이 가장 강할 때,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많이 해보셨으면 해요. 무엇보다 공부는 절대 배신하지 않아요. 지금이 청춘이라고 마냥 놀기보다는, 이 시기가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가능성이 많은 시기라는 걸 잊지 말고, 그 가능성을 공부와 노력으로 채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의학과 1학년 홍서영 학생기자 , 의예과 1학년 김지윤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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